
월레스와 그로밋: 〈Vengeance Most Fowl〉 숨은 매력 읽기

월레스와 그로밋이 유명한 시리즈인지 몰랐다고 하면 믿을지 모르겠지만 진짜 몰랐다. 누가 ‘이 시리즈 안 본 눈 삽니다’ 했으면 어제까지 팔 수 있었다.
세상에, 이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이 벌써 여섯 번째 시리즈라니! 전 세계에서 이렇게나 오래 흥행할 동안 나는 대체 무엇만을 보며 살아왔던가? (정답: 디즈니)
이번 작품이 다섯 번째 시리즈인 <월레스와 그로밋: 빵과 죽음의 문제> 이후 16년 만에 공개된 거라고 하니 원래 팬이었던 사람들은 개봉 소식이 정말로 기뻤겠구나 싶다. 클레이로 표정 하나 동작 하나 디테일하게 만들어 스탑모션으로 제작하려면 시간이 엄청 소요된다고 하는데 실제로 각 시리즈 사이의 시간이 굉장히 긴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나는 음식이나 영화 등 어느 분야든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약간의 거부감 같은 것이 있어서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다. 먹던 것만 계속 먹고, 보던 것만 다시 보는 것을 즐겨 하는 반복의 습성을 가진 인간. 그런 인간이 이 애니메이션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내가 매력적이라고 느낀 포인트를 포스팅 하려고 한다. 스포 아예 없다.
부제에 담긴 유머 – Vengeance most fowl
이 애니메이션의 부제목인 Vengeance Most Fowl에는 영국식 언어 유희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왜 유머러스 한 것인지 알려면 일단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 1막 5장에서 등장하는 대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Murder most foul, as in the best it is; But this most foul, strange, and unnatural.” 죽어서 유령이 된 햄릿의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을 아들에게 설명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대사인데, “murder most foul”은 “가장 비열한 살인”을 의미한다. 유령은 자신의 죽음이 자연의 질서와 인간 도덕을 모두 어긴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murder most foul”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사건을 묘사할 때 비유적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를테면, 정치적 암살이나 역사적 비극을 묘사할 때 이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밥 딜런은 2020년에 “Murder Most Foul”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곡에서는 1963년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을 중심으로 미국의 정치적 부조리를 고찰했다고 한다.

Vengeance Most Fowl는 원래 비극적이고 진지해야 할 복수극을 가볍게 전환하여, “닭(fowl)”과 관련된 유머러스한 복수극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라고 한다. 빨간 고무장갑을 뒤집어 쓰고 닭으로 위장한 펭귄의 모습을 보면, 왜 ‘foul’을 ‘fowl’로 바꿨는지 그 의도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런 패러디는 영국 관객들에게는 셰익스피어적 익숙함과 현대적 재해석 사이에서 웃음을 유발하며, 단순한 유머를 넘어 깊은 문화적 교감을 형성한다.
You get away scot-free with the diamond, and everyone thinks I’m the evil inventor who stole it.
월레스의 대사 중
Why, that’s… that’s vengeance most fowl!
영어 표현 | 원래 의미 | 언어 유희 |
---|---|---|
Vengeance | 복수 | 복수 |
Most Foul | 가장 사악하고 비열 | 셰익스피어 《햄릿》의 인용 |
Most Fowl | 가장 ‘닭 같은’ (fowl = 가금류) | ‘foul’의 철자를 바꿔 만든 말장난 |
그렇다면 이쯤에서 또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생겼으니, 한국어로 부제는 왜 “복수의 날개”인 것일까?
영어 부제의 배경 지식을 이해하고 보니 한국어로 의미가 통하도록 똑같이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인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언어 유희의 민족이라 영국처럼 우리만의 방식으로 저 펭귄을 놀려볼 수 있었을텐데, 부제 선정이 조금 아쉽다.
제작 과정에 담긴 인간미 – 스톱모션
요즘은 ChatGPT 같은 생성형 AI를 이용해 사진을 지브리 스타일의 애니메이션 이미지로 바꾸는 것이 유행이다. 이제는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아도 누구나 만화가나 애니메이션 제작자처럼 보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처음엔 사진 한 장이 예쁜 그림으로 변하는 마법 같은 경험이 신기했지만, 이상하게도 기계적으로 완벽한 결과물에선 점점 감동이 줄어들었고 감탄보다는 피로가 먼저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늦게 접한 《Wallace & Gromit》의 스톱모션 장면들은 달랐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몰입한 것도 있지만 인물, 배경, 소품 등에서 인간미가 느껴지는 질감이 주는 재미가 훨씬 컸다. 굳이 제작 비하인드를 보지 않아도 그 디테일과 제작의 수고로움이 느껴졌다.
세트와 캐릭터 제작 과정
《Wallace & Gromit: Vengeance Most Fowl》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점토(clay) 혹은 실리콘으로 직접 손으로 조형되었다. 기본 골격에는 와이어 뼈대(armature)가 들어 있어, 움직임에 따라 원하는 자세로 고정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번 작품의 핵심 악당인 페더스 맥그로(Feathers McGraw)는 1993년에 방영된 《The Wrong Trousers》에 처음 등장한 이후,30년 만에 다시 등장한 캐릭터다. 제작진은 원작의 모델링을 참고하면서도, 이번 작품의 해상도와 카메라에 맞춰 조형을 약간 더 정교하고 생동감 있게 리디자인했다.
배경 세트는 모두 1:6~1:10 비율로 축소 제작된 미니어처이며, 건물의 벽돌 하나, 창틀, 신문지 조각까지도 실제 비율에 맞춰 수작업으로 제작되었다. 세트는 종이, 나무, 폼보드, 금속, 아크릴 등 다양한 소재가 조합되어 만들어졌으며, 카메라 위치에 따라 조명을 별도로 설치하고 구조를 분해 가능한 형태로 설계했다.
표정 연기를 위해 캐릭터마다 수십~수백 개의 교체용 얼굴 파츠가 만들어졌으며 손 모양, 입 모양, 눈동자 방향까지도 장면마다 미세하게 조정된다. 특히 월레스의 경우, 대사에 맞는 입 모양만 약 40종 이상이 준비되어 있으며, 각각을 손으로 교체하며 촬영한다.
소품 역시 대부분 실물 미니어처로 제작되었으며 열차 세트, 감옥의 보안장치, 로봇팔 기계장치, 치즈 모형, 오븐 속 닭구이 인형까지 모두 세밀하게 손으로 제작되었다.
촬영 기법과 제작 속도
《Vengeance Most Fowl》은 전통적인 스톱모션 촬영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기법은 캐릭터나 소품을 한 프레임마다 조금씩 움직여가며 사진을 찍는 방식으로, 한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수천 장의 스틸 사진이 필요하다.영화는 초당 24프레임(fps)의 속도로 상영되기 때문에 1초짜리 장면을 위해서는 24장의 사진, 30분 분량의 이 작품 전체를 위해서는 43,000장이 넘는 프레임이 필요했다.
실제 촬영 현장에서 애니메이터 한 명이 하루 동안 완성할 수 있는 분량은 평균 2~3초에 불과하다. 이는 카메라 위치, 조명 변화, 배경 세트 조정 그리고 무엇보다 캐릭터의 표정·손짓·시선까지 프레임마다 손으로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고정식 DSLR 장비를 사용했으며, 프레임마다의 위치 변화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용 촬영 레일과 마크 포인트가 사용되었다. 조명도 실제 미니어처 세트에 맞춰 세팅되었고, 햇빛 변화나 그림자 움직임조차 프레임별로 손으로 조정해 일관된 빛과 톤을 유지했다.
감독은 “기계는 시간을 줄이지만, 손은 감정을 남긴다”고 말하며, 이 느리고도 사랑스러운 작업 방식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짧은 감상평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어른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함께 볼만한 영화로 추천한다.
아이들은 이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는 행동과 모험을 즐기게 되고, 어른들은 은은하게 배어 있는 유머의 깊이에 웃음을 짓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충분히 흥미롭고 몰입감 있는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람의 손으로 한 장면 한 장면 직접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은 아이들에게는 무언가를 만드는 즐거움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어른에게는 느리지만 따뜻한 방식이 아직까지도 존재한다는 위로를 건네준다.

